브라질에 오래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마주치게 되는 문화적 차이가 있다. 바로 시간 약속에 대한 인식이다. 한국에서는 약속 시간에 5분만 늦어도 마음이 조급해지고, 상대방이 10분만 늦어도 짜증이 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브라질은 다르다. 이곳에서는 ‘조금 늦는 것’이 일상이자 자연스러운 문화로 받아들여진다.
시간은 정확하지 않아도 괜찮다
브라질에서 모임이나 파티가 “오후 2시 시작”이라고 적혀 있어도 실제로 2시에 도착하는 사람은 드물다. 보통은 2시 30분, 늦으면 3시가 다 되어서야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심지어 주인공조차 약속된 시간보다 늦게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식 사고로 보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브라질 사람들은 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길이 막혔어”라든지 “준비하다 보니 늦었네” 정도의 변명만으로 충분하다. 늦은 사람도 당당하고, 기다리는 사람도 별로 화내지 않는 분위기다.
지각 문화의 뿌리
이러한 지각 문화에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 첫째, 브라질은 국토가 워낙 넓고 교통 사정이 불안정하다. 상파울루나 리우 같은 대도시에서는 교통 체증이 일상이다.
구글 맵에서 ‘30분 거리’라고 나와도 실제로는 1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환경에서 약속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은 애초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둘째, 브라질 사회는 인간관계를 시간보다 더 중시한다. 약속에 조금 늦더라도, 상대방과 만나서 따뜻하게 대화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관계 중심적 문화가 시간을 압도하는 셈이다.
지각 문화의 장점
브라질의 지각 문화는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보다 훨씬 여유롭고 인간적이다.
- 관계 중심: 시간을 몇 분 어기는 것보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늦었네”라는 말보다는 “와줘서 고마워”라는 인사가 먼저 나온다.
- 스트레스 완화: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쓰지 않으니, 늘 촉박하게 달리는 느낌이 적다. 조금 늦더라도 서로 웃으며 넘어가니 마음이 편하다.
- 낙천적 태도: 이런 문화가 쌓이다 보니 브라질 사람들의 전체적인 성격이 여유롭고 낙천적으로 형성된 부분도 있다.
지각 문화의 단점
하지만 단점 역시 크다.
- 비즈니스 신뢰 문제: 회의나 중요한 미팅에서 30분, 1시간씩 늦는 경우는 한국인이나 외국인에게 큰 불신을 준다.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약속도 지키지 않는다”라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
- 효율 저하: 지각이 반복되면 하루 일과 자체가 계속 밀린다. 누군가 한 명 늦으면, 그 뒤의 일정들이 전부 무너지는 경우가 잦다.
- 습관화 위험: 사회적으로 용인되다 보니, 지각이 생활 습관으로 굳어진다. 처음에는 파티에만 늦던 사람이, 나중에는 직장이나 중요한 일에도 습관적으로 늦게 된다.

내가 직접 겪은 황당한 경험
내가 처음 이 문화를 체감했던 건 대학 시절이었다. 친구 생일 파티가 저녁 7시라기에, 나는 한국식으로 정확히 맞춰 갔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해보니 정작 아무도 오지 않았고, 주인공조차 집에 없었다.
7시 30분이 넘어가도 손님이 거의 없었고, 결국 파티다운 분위기는 8시가 넘어서야 시작됐다.
나는 괜히 일찍 와서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아… 이게 브라질식이구나’ 하고 실감했다.
비슷한 경험은 비즈니스 자리에서도 있었다. 어떤 브라질 거래처와 10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나는 9시 50분쯤 미리 도착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10시 40분에 나타났다.
한국 같았으면 화가 치밀었을 텐데, 브라질에서는 이런 상황이 너무 흔해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이 정도면 빨리 온 거야”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자영업자로서 느낀 현실적인 헤프닝
나는 현재 브라질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다. 직원들과 함께 일을 하다 보면, 지각이 단순히 ‘문화 차이’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어떤 직원은 아침 출근 시간에는 늘 20~30분 늦으면서도, 정작 점심시간이나 커피 브레이크는 칼같이 챙긴다.
더 황당한 건, 이들이 늦으면서도 “늦은 만큼 월급에서 깎아라”라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죄책감이 아니라, 오히려 배짱처럼 느껴지는 뉘앙스다.
한국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태도인데, 여기서는 당당하게 그런 말을 내뱉는 경우도 있다.
사장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 한국식 사고로 보면 ‘지각 = 잘못’이고,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는데, 브라질에서는 ‘어차피 다 늦으니까 큰 문제 아니다’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결국 자영업자는 늘 이 간극 속에서 갈등하게 되고, 때로는 내가 괜히 예민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점점 나도 변해가는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브라질에 오래 살다 보니 점점 이 문화에 물들어가는 걸 느낀다. 예전 같았으면 약속에 늦는 걸 상상도 못 했는데, 지금은 5분, 10분 늦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조금 늦어도 상대방도 괜찮아할 거야”라는 안일한 마음이 생기곤 한다.
이럴 때마다 스스로가 무섭다. ‘혹시 나도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에서 지켜왔던 철저한 시간 개념이 점점 사라지는 게 아닐까 두려워진다. 물론 어느 정도는 적응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경계가 흐려지면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불안하다.
글을 마치며
브라질 사람들의 지각 문화는 분명 장단점이 공존한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지만, 동시에 신뢰와 효율성을 깎아먹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결국 중요한 건 균형이다.
브라질식 여유로움을 즐기되, 필요할 때는 한국식 시간 감각을 잃지 않는 것.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요즘의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도 점점 브라질식으로 변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다 결국, 철저함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