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기분
가끔 보면 내가 딱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브라질에선 ‘꼬레봉(Corebão)’이라는 말을 듣는다.
한국 사람인데 한국식 정서를 그대로 가지고 사는 사람, 브라질 사회 안에 살고는 있지만 사고방식이나 감정선은 끝까지 한국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처음엔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 말이 반복될수록 묘하게 가슴에 남는다.
누군가는 웃으며 던지고, 누군가는 아무 생각 없이 쓰는 말인데, 그 단어 하나에 내가 걸어온 시간이 전부 압축돼 있는 것 같아서다.
그 말 속에는 ‘너는 우리랑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뉘앙스가 분명히 들어 있다.
한국에 가면, 나는 이미 외국인
그런데 웃긴 건 한국에 가면 정반대의 말을 듣는다는 거다. “야, 너 완전 검은 머리 외국인 다 됐네.” 말투도, 반응도, 생각하는 방식도 예전 같지 않다며, 나를 한국 사람이라기보다는 외국 생활에 길들여진 누군가로 본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하나, 행동 하나에 “외국 오래 살더니 다르네”라는 평가가 붙는다.
예전 같으면 자연스럽게 공감했을 장면에서 한 박자 쉬고,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는 그 습관이, 한국에서는 어색함으로 보인다.
그렇게 나는 브라질에서도, 한국에서도 늘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양쪽에서 동시에 듣는 ‘다르다’는 말
이런 말을 양쪽에서 동시에 듣다 보면, 결국 나는 어느 쪽에서도 ‘완전히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한국에 있을 땐 내가 너무 느긋하고, 너무 거리 두는 사람처럼 보이고, 브라질에선 내가 너무 계산적이고, 너무 눈치를 보는 사람처럼 보인다.
한국에서는 왜 그렇게 말수를 아끼냐고 묻고, 브라질에서는 왜 그렇게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냐고 묻는다.
같은 나인데,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으로 해석된다.
이 차이가 쌓일수록, 나는 자연스럽게 어디서든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어 간다.
보이지 않게 그어지는 선
한국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내 반응 하나에 “아, 확실히 오래 밖에 살았구나”라는 말이 따라온다.
웃음 포인트가 다르고, 화를 내는 지점이 다르고, 불편해하는 기준도 달라졌다고 한다.
반대로 브라질 사람들과 깊은 얘기를 하다 보면 “그래도 너는 한국 사람이네”라는 선이 보이지 않게 그어진다.
책임을 대하는 태도, 약속을 바라보는 시선, 인간관계에서 기대하는 깊이가 다르다는 말로 포장되지만, 결국 그 말의 끝에는 ‘너는 우리 쪽은 아니다’라는 구분이 남는다.
그 선은 누구도 악의로 긋지 않지만, 늘 분명하게 존재한다.
어정쩡함이라는 상태
어정쩡하다는 표현이 딱 맞다. 어느 쪽으로 가도 설명이 필요하고, 어느 쪽에서도 100% 편해지지는 않는다. 한국에 가면 다시 적응해야 하고, 브라질에선 이미 적응했지만 끝까지 섞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인지조차 헷갈린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계속 떠 있는 상태로 사는 사람인지.
비행기 표를 끊을 때마다, ‘집에 간다’는 말이 어느 나라를 의미하는지 잠시 멈칫하게 된다.

중간에 서 있다는 건 생각보다 피곤하다
이런 상태는 생각보다 사람을 지치게 한다. 어디서든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감각은, 일상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다가도 중요한 순간마다 고개를 든다.
아플 때, 힘들 때, 큰 결정을 해야 할 때, 그때마다 나는 어느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지 잠시 멈춘다. 한국식 정서로 보면 너무 냉정해 보이고, 브라질식 정서로 보면 너무 예민해 보이는 그 중간에서, 스스로를 설득해야 한다.
그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혼자서 모든 걸 정리하는 데 익숙해진다.
두 문화를 안다는 것의 현실적인 장점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나니, 이 상태가 꼭 결핍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두 문화를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건, 때로는 분명한 장점으로 작용한다.
상황에 따라 어떤 기준으로 반응해야 할지 알고 있고, 어느 쪽의 감정선이 예민한지도 대충 감이 온다. 무엇보다 남들이 쉽게 가지지 못하는 두 개 언어를, 그것도 모국어에 가깝게 쓸 수 있다는 건 꽤 큰 자산이다.
단순히 말을 번역하는 수준이 아니라, 농담의 결이나 미묘한 뉘앙스, 분위기까지 오갈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강력한 무기다.
정체성이 방패가 될 때
가끔은 이 정체성이 방패처럼 쓰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이건 브라질 정서랑 안 맞아서 내가 그런 거다”라고 말하면, 괜히 더 캐묻지 않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생긴다.
굳이 모든 걸 설명하지 않아도,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렇다’는 한마디가 적당한 거리감을 만들어 준다. 반대로 브라질에서는 “이건 한국 정서랑 좀 안 맞아서 그렇다”고 말하면, 그 또한 나름의 이해 구실이 된다.
완벽한 핑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거짓도 아닌, 묘하게 설득력 있는 이유다.
애매함이 만들어준 생존 기술
이렇게 보면 나는 불편한 자리를 비교적 잘 피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에서도 100% 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어느 쪽에도 완전히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한국식 기준으로는 너무 직설적인 상황에서 한 발 물러설 수 있고, 브라질식 기준으로는 너무 느슨해지는 순간에 스스로 선을 긋는다.
남들 눈에는 애매해 보일 수 있지만, 나한테는 그 애매함이 일종의 생존 기술처럼 작동한다.
장점 아닌 장점
생각해 보면, 이건 장점 아닌 장점이다. 자랑할 만큼 뚜렷한 정체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쓸모없는 애매함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기준을 옮겨 붙일 수 있고, 필요할 땐 한국 사람으로, 필요할 땐 외국인으로 물러날 수 있다.
이걸 비겁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오래 중간에 서 있었던 사람이 터득한 균형감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를 지키는 방식으로 남은 태도
결국 나는 양쪽을 다 이해하기 때문에 더 피곤해지는 순간도 많지만, 동시에 그 이해 덕분에 불필요하게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도 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를 쉽게 단정하지 않게 되었고, 그 대신 “아, 이래서 그렇구나”라고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이 태도는 한국에서도, 브라질에서도 완전히 환영받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 자신을 지키는 데는 꽤 도움이 된다.
꼬레봉과 검은 머리 외국인 사이에서
그래서 이 어정쩡한 위치는 여전히 불편하지만, 예전처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지는 않게 됐다. 완전히 어느 편도 아닌 대신, 상황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으니까.
브라질에선 꼬레봉, 한국에선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말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때로는 그 모호함을 무기로 삼고, 때로는 방패로 삼으며 살아간다.
완전히 어느 쪽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 쪽도 아닌 건 아닌 상태로, 그 애매한 정체성 속에서 오늘도 하루를 살아낸다. 그리고 이제는 그 중간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를, 조금은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 자리가 불편하긴 해도, 적어도 거짓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