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브라질에서 ‘요령’이 ‘법’보다 강할 때
브라질에서 몇 년을 살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단어를 꼽으라면 단연 ‘제이치뉴(Jeitinho)’입니다. 포르투갈어로 ‘작은 방식’이라는 뜻인데, 처음에는 그저 ‘융통성’이나 ‘요령’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브라질 사회의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때로는 삶을 편하게 해주는 ‘마법의 열쇠’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정부패의 그림자’가 되기도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정(情)’이나 ‘빨리빨리’ 문화가 있지만, 브라질의 제이치뉴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건 공식적인 규칙을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우회하는 기술입니다.
그리고 이 제이치뉴를 얼마나 잘 쓰느냐에 따라 브라질 생활의 난이도가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브라질에서 직접 겪거나 목격한, 제이치뉴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생생한 ‘썰’들을 풀어보려 합니다.
2. 긍정적 제이치뉴: ‘이 정도는 봐주자’는 인간적인 융통성
제이치뉴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브라질의 관료주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하고 비효율적입니다. 이럴 때 제이치뉴는 숨통을 트이게 하는 ‘인간적인 해결책’이 됩니다.
2.1. 마감 시간 5분 후의 기적: 은행 창구 썰
제가 겪은 가장 흔한 제이치뉴는 은행에서였습니다. 급하게 서류를 처리해야 하는데, 도착하니 마감 시간(오후 4시)이 5분이 지난 겁니다. 한국 같으면 “내일 오세요”가 정답이겠죠.
하지만 브라질에서는 달랐습니다. 저는 창구 직원에게 “정말 급하다. 오늘 처리 못 하면 큰일 난다”며 사정을 했습니다. 물론, 그냥 사정만 한 건 아닙니다. 최대한 인간적인 친밀감을 표시하며, 그 직원의 ‘능력’을 치켜세웠습니다.
“당신이 아니면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없다. 당신은 정말 유능해 보인다.”
결국 그 직원은 “원래 안 되는데, 당신이 너무 간절해 보여서 특별히 해주는 거다”라며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규칙을 어긴 것이지만, 그 순간 저에게는 구원이었죠. 이것이 제이치뉴의 긍정적인 면입니다.
경직된 시스템을 인간적인 관계와 융통성으로 잠시 멈추게 하는 힘.
2.2. ‘내 친구’ 찬스: 인맥을 통한 우회
브라질에서 “Eu tenho um amigo que…” (나, ~하는 친구 있어)라는 말은 마법의 주문과 같습니다.
복잡한 서류 절차나 관공서 업무를 처리할 때, 아는 사람을 통해 ‘라인’을 타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썰: 한 번은 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현지 친구가 “자기 삼촌이 그 부서에서 일한다”며 전화를 걸어줬습니다. 다음 날,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는 서류가 단 하루 만에 처리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제이치뉴입니다. 공식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고, 개인적인 관계(인맥)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 것이죠.
겉으로는 공정하지 않지만, 브라질 사회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방식입니다.
3. 부정적 제이치뉴: ‘뒷돈’과 ‘부정부패’의 경계

문제는 이 ‘융통성’이 ‘금전적 대가’와 결합하면서 명백한 부정부패로 변질될 때 발생합니다. 경찰이나 경비원에게 뒷돈을 주는 사례는 제이치뉴의 가장 어둡고 위험한 단면입니다.
3.1. 줄 서기 우회와 경비원의 ‘커피 값’ 썰
브라질의 인기 있는 식당이나 클럽 앞은 줄이 길기로 악명이 높습니다. 이때, 제이치뉴가 발동합니다.
•썰: 상파울루의 유명한 클럽 앞에서 줄을 서고 있는데, 경비원이 저에게 다가와 “R$ 50(헤알)만 주면 바로 입장시켜 주겠다”고 속삭였습니다. 저는 거절했지만, 제 뒤에 있던 현지인 커플은 웃으며 돈을 건네고 바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뇌물입니다. 경비원은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공정한 규칙(선착순)을 위반하고 개인적인 이득을 취한 것이죠.
이 커플에게는 ‘시간을 절약하는 제이치뉴’였겠지만, 저와 같이 줄을 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공정함 그 자체였습니다.
3.2. 경찰과의 위험한 거래: ‘커피 한 잔’의 유혹
가장 위험한 제이치뉴는 경찰과의 상황입니다. 브라질에서 운전하다 보면, 경찰의 검문은 일상입니다.
•썰: 제 지인이 겪은 일입니다. 사소한 교통 위반으로 경찰에게 잡혔는데, 경찰이 벌금 고지서 대신 “오늘 날씨가 더운데, 시원한 커피 한 잔 마실 돈이 필요하다”며 은근히 돈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지인은 “벌금을 내겠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서류 처리를 지연시키며 압박했고, 결국 지인은 ‘귀찮음’과 ‘시간 낭비’를 피하기 위해 소액의 돈을 건네고 풀려났습니다.
이 상황에서 돈을 건넨 행위는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제이치뉴’였을까요? 아니면 ‘경찰의 부패에 동조한 뇌물 공여’였을까요? 브라질에서는 이 둘의 경계가 너무나 모호합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후자이며, 이 제이치뉴가 브라질 사회의 구조적인 부패를 유지시키는 핵심 동력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4. 제이치뉴가 부정부패로 이어지는 메커니즘
제이치뉴가 부정부패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은 간단합니다.
1.비효율적인 시스템: 브라질의 복잡하고 느린 관료 시스템이 제이치뉴의 ‘수요’를 만듭니다. 사람들은 합법적인 절차를 기다릴 인내심이 없습니다.
2.개인적 관계의 우선: 공식적인 규칙보다 개인적인 관계와 인맥이 더 중요하게 작동하는 문화가 제이치뉴의 ‘공급’을 만듭니다.
3.금전적 대가: ‘융통성’을 제공하는 대가로 ‘금전적 대가(뒷돈)’가 오가기 시작하면, 이는 더 이상 융통성이 아니라 부정부패가 됩니다.
결국 제이치뉴는 ‘나만 편하면 된다’는 이기심과 ‘규칙은 어겨도 된다’는 사회적 불신이 결합된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이 문화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돈이나 인맥이 있는 사람은 제이치뉴를 통해 모든 것을 빠르게 해결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느리고 복잡한 공식 절차에 갇히게 됩니다.
5. 에필로그: 브라질에서 제이치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브라질에서 살면서 제이치뉴를 완전히 피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화를 현명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단호한 거절: 경찰이나 공무원이 명백한 뒷돈을 요구할 때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공식적인 절차를 요구해야 합니다. 물론 이 과정이 피곤하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것이 장기적으로 브라질 사회와 우리 자신을 지키는 길입니다.
•긍정적 활용: 인간적인 친밀감을 통해 정당한 범위 내에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긍정적 제이치뉴’는 현지 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핵심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을 지키는 것입니다.
브라질은 매력적인 나라이지만, 이처럼 복잡한 문화적 그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이치뉴의 양면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융통성과 부정부패 사이의 선을 명확히 그을 때, 비로소 브라질 생활의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이 브라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 이 글은 필자의 경험과 현지에서 전해 들은 ‘썰’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브라질 사회의 모든 면을 대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썰 뿐만 아니라 나도 부정부패에 가담을 한적도 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