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한 잔이면 꼭 나오는 브라질 영원한 떡밥
브라질에서 맥주 한 잔만 들어가면 반드시 튀어나오는 떡밥이 있다.
Ronaldinho vs Neymar, 누가 더 잘했냐는 질문이다. 상파울루든 리우든, 동네 바에서 스콜 (맥주 브랜드) 하나 까다 보면 꼭 누군가 이 얘기를 꺼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늘 같은 말을 한다. 이 둘을 같은 선상에 올려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에 가깝다고. 이 말이 네이마르를 깎아내리자는 뜻은 아니다.
나도 산투스 팬이고, 네이마르가 어린 시절 보여줬던 그 번뜩임과 흥분을 사랑했다.
다만 축구를 ‘숫자’가 아니라 ‘경험’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비교는 결국 감정과 시대의 문제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커리어와 기록으로 보면 네이마르가 유리하다
커리어만 놓고 보면 네이마르는 설명하기 쉬운 선수다. 득점 수가 많고, 전성기가 길었고, 현대 축구에서 요구되는 스피드와 결정력, 스타성까지 모두 갖췄다.
산투스에서 보여준 폭발력, 유럽 무대에서의 성과, 꾸준히 쌓아 올린 기록은 그를 브라질 축구의 간판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냉정하게 말해, 기록과 트로피로 말하는 시대라면 네이마르의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훨씬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축구는 숫자보다 기억으로 남는다
그런데 문제는, 축구가 정말 그걸로만 평가되느냐는 데 있다. 내 개인적인 기준에서 축구는 기억에 남는 장면의 총합이고, 그 장면들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그 기준으로 보면, 내 청소년기를 통째로 흔들어버린 선수는 단 한 명, 호나우지뉴였다. 그가 공을 잡는 순간 경기장의 공기가 달라졌고, “이제 뭐가 나올까”라는 기대감이 먼저 앞섰다.
전술도, 포지션도, 상대 수비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축구를 ‘풀어버렸다’. 축구가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이렇게 웃으면서 상대를 농락해도 된다는 걸 처음 보여준 사람이었다.

다시는 나오기 힘든 순수한 테크니션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봐도 그렇다. 드리블, 퍼스트 터치, 발바닥 사용, 몸의 리듬, 상대의 무게중심을 속이는 페인트 하나까지, 모든 게 교과서 바깥에 있었다.
지금은 유튜브에 기술 영상이 넘쳐나고, 어린 선수들도 어릴 때부터 훈련된 테크닉을 장착하고 나오지만, 그 시절엔 그런 게 아니었다.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는 ‘연습의 결과’라기보다 ‘타고난 감각이 폭발한 장면’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고, 그래서 더 다시는 안 나올 것처럼 느껴진다.
월드컵 타이틀이라는 가장 강력한 논쟁 포인트
여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또 하나의 논쟁이 있다. 바로 월드컵 타이틀이다. 브라질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분위기는 다시 한 번 갈라진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월드컵 우승은 누가 했냐?” 호나우지뉴는 2002년 월드컵 우승 멤버였고, 그 대회에서 보여준 존재감은 단순히 스쿼드 한 자리를 채운 수준이 아니었다.
반면 네이마르는 아직 월드컵 우승 트로피가 없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논쟁은 금세 감정 싸움으로 번진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는 결국 월드컵”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개인 능력과 팀 성과를 동일선상에 놓는 건 무리”라고 반박한다. 그래서 이 주제는 끝이 없다.
무엇을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답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월드컵 이야기가 나올수록, 호나우지뉴의 상징성은 더 강해지고 네이마르는 더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내가 호나우지뉴를 선택하는 결정적인 이유
내가 호나우지뉴에게 손을 들어주는 결정적인 이유는, 사실 축구 실력 그 자체보다도 태도에 있다. 그는 경기장에서 질질 짜지 않았다. 파울을 당해도, 넘어져도, 일어나서 웃었다.
심판에게 매달리지 않았고, 관중에게 어필하지도 않았다. 대신 다음 플레이에서 상대를 더 크게 망신 주는 방식으로 응답했다.
그게 브라질 사람들이 말하는 jogo bonito의 본질이었다. 상대를 이기는 데 집착하기보다, 축구 자체를 즐기고, 그 즐거움을 보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 그는 진짜 스타였고, 진짜 축구선수였다.
네이마르가 비판받는 지점
반대로 네이마르는 너무 자주 경기의 중심을 ‘자기 자신’에게 끌어당긴다. 파울 하나에 표정이 먼저 바뀌고, 몸을 굴리고, 관중을 보고, 심판을 본다.
물론 현대 축구가 거칠어졌고 선수 보호가 중요해진 것도 사실이다. 네이마르가 당하는 파울이 많다는 점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 모든 맥락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반응은 종종 과하다. 축구보다 ‘쇼’가 먼저 나오는 순간들이 반복되면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피로감이 쌓인다.
그래서 브라질에서도 늘 이런 말이 나온다. “실력은 인정하는데, 보고 있으면 짜증난다.”
브라질 축구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그림자
사실 이 비교가 계속 나오는 이유 자체가, 브라질 축구가 아직도 그 시절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본다.
호나우지뉴 이후 브라질은 ‘이기는 팀’은 여러 번 만들었지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선수’는 다시 만들지 못했다. 월드컵을 들었던 세대도 있었고, 유럽 클럽에서 성공한 선수들도 많았지만, 경기 끝나고 나면 늘 이런 말이 남았다. “잘하긴 했는데, 예전만큼 설레지는 않는다.” 이 말이 모든 걸 설명한다.
승패보다 장면을 기억하던 시절
호나우지뉴가 뛰던 시절, 브라질 사람들은 승패보다 장면을 먼저 이야기했다. 오늘 이겼냐 졌냐보다, “오늘 그거 봤냐?”가 먼저 나왔다.
말도 안 되는 각도에서 나온 패스, 상대 수비 세 명을 동시에 바보로 만든 터치 하나, 골로 이어지지 않아도 모두가 웃게 만든 플레이.
그런 장면들이 쌓여서 한 선수를 전설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하이라이트는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증명해야 했던 네이마르의 축구
반면 네이마르는 언제나 결과의 중심에 서 있었다. 팀의 승리, 자신의 기록, 다음 경기의 컨디션, 부상 관리, 이미지 관리까지 모든 것이 얽혀 있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진 채 축구를 한다. 그래서 플레이 하나하나에 여유가 없다. 기술은 분명 뛰어나지만, 그 기술이 ‘놀기 위해’ 쓰이기보다는 ‘증명하기 위해’ 쓰인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 차이가 보는 사람의 심리를 갈라놓는다.
세대별로 갈리는 브라질의 평가
브라질에서 네이마르에 대한 평가가 유독 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린 세대는 네이마르를 좋아한다. 숫자와 클립에 익숙한 세대다.
반면 30대 후반, 40대 이상은 고개를 젓는다. “저건 브라질 축구가 아니다”라는 말을 쉽게 한다. 그 말 속에는 단순한 향수뿐만 아니라, 축구를 대하는 철학의 차이가 담겨 있다.
브라질 축구는 원래 고통을 숨기고 웃는 쪽이었다. 넘어져도 웃고, 맞아도 웃고, 그 다음 플레이로 상대를 더 크게 망신 주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이 비교는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네이마르가 파울에 과민하게 반응할 때마다, 브라질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비교를 꺼낸다. “옛날 같았으면…”이라는 말과 함께.
물론 시대가 바뀌었고 환경도 달라졌지만, 스타의 상징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호나우지뉴는 브라질이라는 나라의 축구 이미지를 그대로 몸에 두르고 뛰는 선수였다.
반면 네이마르는 세계적인 스타이긴 하지만, 그 이미지가 너무 글로벌화되면서 브라질 특유의 색은 점점 옅어졌다.
결국 기준의 문제다
이게 내가 이 둘을 같은 저울에 올리는 걸 불편해하는 이유다. 누가 더 잘했느냐는 질문은 결국, 축구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다.
골 수로 기억하느냐, 아니면 그 시절의 공기와 감정으로 기억하느냐. 내 기억 속에서 축구는 아직도 호나우지뉴가 공을 잡던 순간의 환호로 남아 있다. 그때의 설렘은 어떤 스탯으로도 대체되지 않는다.
나의 결론
그래서 나는 이 비교에서 항상 같은 결론으로 돌아온다. 네이마르는 위대한 선수고, 브라질 축구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호나우지뉴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하나의 기준이고, 하나의 시대였고, 다시 오지 않을 감각이었다.
축구를 ‘가장 잘했다’는 표현이 허락된다면, 그건 단순히 골을 많이 넣었기 때문이 아니라, 축구라는 행위를 가장 축구답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만큼은, 내 마음속 답은 이미 오래전에 정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