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국민 슬리퍼, 하바이아나스 이야기

브라질 길거리를 걷다 보면 발밑에서 공통점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부자든 서민이든, 해변이든 도심이든, 거의 모두가 같은 슬리퍼를 신고 있다는 것.

바로 하바이아나스(Havaianas)다. 브라질을 대표하는 국민 슬리퍼이자, 한국에서도 여름이면 심심찮게 보이는 그 쪼리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브라질에 살면서 보니, 이 슬리퍼는 단순한 신발을 넘어 브라질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정서까지 담고 있는 물건이었다.

사실은 ‘아바이아나스’에 가깝다

먼저 발음 얘기부터. 한국 사람들은 철자에 H가 있으니 ‘하바이아나스’라고 읽는데, 브라질 포르투갈어에서는 단어 첫머리의 H를 소리 내지 않는다.

그래서 현지 발음은 ‘하’가 아니라 ‘아바이아나스’에 훨씬 가깝다. 브라질에서 “하바이아나스 어디서 팔아요?” 하면 못 알아들을 수 있으니, ‘아바이아나스’라고 해보자.

참고로 이 H 묵음 규칙은 브라질 지명이나 이름에도 두루 적용된다.

예를 들어 축구선수 호나우두(Ronaldo)도 철자만 보면 ‘로날도’지만 브라질에선 R을 목구멍에서 굴려 ‘호나우두’로 발음하고, 반대로 H는 아예 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런 발음 규칙 하나만 알아둬도 브라질에서 훨씬 매끄럽게 소통할 수 있다.

이름부터 ‘하와이 사람들’

하바이아나스라는 이름은 포르투갈어로 “하와이 사람들”을 뜻하는 여성형 단어에서 유래했다. 브라질 브랜드인데 왜 하와이일까 싶지만, 여기엔 사연이 있다.

이 슬리퍼는 하와이에서 유행하던, 일본 전통 샌들 ‘조리(zori)’에서 영감을 받은 샌들을 본떠 만들어졌다. 그래서 하와이에 대한 경의를 담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일본 게다 → 하와이 → 브라질로 이어진, 은근히 글로벌한 족보를 가진 슬리퍼인 셈이다.

지구 반대편의 일본식 샌들이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에서 대중화되고, 다시 남미 브라질에서 국민 아이템으로 재탄생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물건 하나에도 이렇게 문화가 섞이고 이동한 흔적이 남아 있다.

밑창의 쌀알 무늬

하바이아나스를 뒤집어 보면 밑창에 촘촘한 쌀알 모양 무늬가 있다. 이건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브라질의

주식인 쌀에서 따온 이 패턴은 하바이아나스의 상징이 됐고, 지금도 정품임을 알아보는 표식으로 통한다.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파는 짝퉁도 많은데, 밑창의 쌀알 무늬와 특유의 로고를 보면 진짜와 가짜를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다.

유연성이 뛰어난 고무 밑창의 배합 비율은 지금도 비밀에 부쳐져 있는데, 이 고무가 브랜드가 세계적으로 성공한 핵심 열쇠였다.

실제로 신어보면 값싼 쪼리와 확실히 다른, 쫀득하고 편한 착화감이 있다. 오래 신어도 밑창이 금방 닳거나 끊어지지 않고, 물에 젖어도 금방 마르며 세척도 간편하다.

브라질의 덥고 습한 날씨에 최적화된 신발이라고 할 수 있다.

1962년생, 22억 켤레의 전설

하바이아나스는 1962년 브라질 제조업체 알파르가타스(Alpargatas)가 만들고 특허까지 받은 브랜드다. 처음엔 그저 값싸고 튼튼한 서민용 슬리퍼였다.

노동자들이 부담 없이 신을 수 있는 실용적인 신발로 출발한 것이다. 그러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콘셉트로 세계를 휩쓸었고, 출시 이후 전 세계에서 22억 켤레 넘게 팔려나갔다.

2000년에는 공식적으로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싸구려 쪼리’에서 전 세계가 아는 패션 아이템으로 신분 상승을 한 것이다.

지금은 세계 곳곳의 편집숍과 백화점에서 팔리고, 명품 브랜드와 협업 라인까지 내놓는 어엿한 글로벌 브랜드가 됐다. 반세기가 넘도록 기본 디자인은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꾸준히 사랑받는다는 점이 대단하다.

브라질에서 계급을 지운 신발

하바이아나스가 특별한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브라질은 빈부격차가 큰 나라지만, 이 슬리퍼만큼은 계층을 가리지 않는다.

파벨라(빈민가)의 청년도, 부촌의 사업가도 똑같은 하바이아나스를 신고 다닌다. 브라질 사람들에게 이 슬리퍼는 집에서 신는 실내화이자, 동네 마실 나갈 때 신는 외출화이고, 해변에서 신는 비치 샌들이기도 하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브라질 특유의 편안한 라이프스타일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신발인 셈이다.

물론 지금은 명품 브랜드와 협업한 고가 라인부터 기본형까지 종류가 다양해졌지만, 브라질 사람에게 하바이아나스는 여전히 ‘누구나 신는 우리 신발’이라는 정서가 깔려 있다.

가격은? 50헤알이면 산다

가격대는 라인에 따라 꽤 다양하다. 명품 협업 라인이나 특별판은 값이 제법 나가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기본형은 부담이 없다.

한 켤레에 대략 50헤알(약 만 원대 초중반) 정도면 무난하게 살 수 있다. 색깔이나 디자인, 브라질 국기 로고가 박힌 버전이냐에 따라 가격이 조금씩 오르내리지만, 기본 모델은 이 선에서 해결된다.

한국 정식 매장 가격과 비교하면 확실히 저렴한 편이다. 브라질에서는 슈퍼마켓, 약국, 신발 가게는 물론이고 길거리 노점에서도 팔 만큼 흔해서,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

여러 켤레를 살 생각이라면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보다 현지 매장이나 아웃렛을 노리면 더 저렴하게 구할 수도 있다.

여행 기념품으로 딱

브라질에 왔다면 하바이아나스는 기념품으로 강력 추천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브라질이 원산지라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에선 못 보는 색깔과 디자인, 지역 한정판이나 브라질 국기 버전까지 골라 사는 재미가 있다. 둘째, 앞서 말했듯 현지 가격이 한국보다 확실히 저렴하다. 셋째, 가볍고 부피도 작아서 여러 켤레 사와도 짐이 안 된다.

캐리어 구석에 몇 켤레를 욱여넣어도 무게가 거의 안 나가니 부담이 없다. 브라질 어느 마트나 신발 가게, 공항 면세점에서도 쉽게 살 수 있으니 접근성도 좋다.

사이즈는 브라질 표기(33/34, 35/36 식으로 두 사이즈가 함께 적힌 경우가 많다)라 한국 사이즈와 조금 다르니, 살 때 한 번 신어보고 고르는 걸 추천한다.

실제로 나도 한국 들어갈 때마다 지인들한테서 몇 켤레씩 사다 달라는 부탁을 꼭 받는다. 그만큼 가볍게 주고받기 좋은, 실패 없는 브라질 선물이라는 얘기다.

부피도 안 나가고 가격도 착하니 부탁하는 사람도 부담이 없고, 받는 사람도 실용적이라 좋아한다. 가족·친구 몫으로 몇 켤레 담아오면 다들 좋아하니, 브라질 여행 선물 고민이라면 일단 하바이아나스 몇 켤레는 리스트에 넣어두자.

정리하면

하바이아나스는 단순한 슬리퍼가 아니라 브라질 그 자체를 담은 물건이다. 하와이에서 온 이름, 쌀알 무늬 밑창, 계층을 가리지 않는 국민성, 그리고 ‘아바이아나스’라는 현지 발음까지.

작고 값싼 슬리퍼 한 켤레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게 브라질이라는 나라의 매력이기도 하다. 브라질 여행을 왔다면 한 켤레쯤 사서 직접 신어보자. 발밑에서 브라질을 느끼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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